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도 막부 (문단 편집) == 대외관계 == 에도 막부가 존속한 기간은 대체로 외국과 교류하지 않은 쇄국주의를 고집하던 시대와 일치하지만, [[조선]]과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켰다는 명분 등으로 국교를 맺어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. [[류큐 왕국]]은 1609년 [[사츠마]] 번에 의해 침략당한 후 복속되어 종종 [[에도]]에 사절단을 보내 조빙하는 등 교류하였다. 또한 에조치(홋카이도)를 완전히 점령하고 가라후토(사할린)와 치시마 열도(쿠릴 열도) 남단까지 세력을 뻗쳐 [[아이누]]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. 특히 조선에서는 총 12회에 걸쳐 [[조선 통신사]]를 파견해 두 나라 간의 우호통상관계와 [[쇼군]]의 권위 과시, 선진 문화[* 정확히는 주자학([[성리학]]) 중심의 중국계 문화. 주자학은 당시 일본의 체제정비에 큰 영향을 끼친다.]의 수용에 큰 기여를 하였다.[* 그래서인지 조일 관계는 에도 시대가 끝난 후 [[정한론]]을 내세운 인물들이 상당하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자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. 애초에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이 다이묘 가문이 도요토미 일가를 지지했던 가문(모리, 시마즈)들이었기에 에도 시대 동안 숨 죽이고 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었던걸 감안하면 참 묘하다.] 국교를 맺지는 않았지만 [[네덜란드]], [[청나라]] 등과도 [[교역]]하였다. 특히 [[데지마]]를 통해 소규모로나마 네덜란드와 지속적으로 교류한 덕분에 쇄국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서방 세계를 비롯한 국제 정세에 대해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었고,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기술과 학문 등 서구문물을 국가적 차원에서 연구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는데 이를 '[[난학]]'이라고 한다. 이러한 서구 세계와의 경험은 훗날 개항 이후 일본이 비교적 빠르게 근대화하는데 기반이 된다. [[동녕국]]과도 교역을 했는데 [[정지룡]], [[정성공]], [[정경(동녕국)|정경]]은 일본에 원병을 청하기도 했다. 하지만 에도 막부는 교역으로 일본도 등을 수출하는 것은 묵인했지만, 쇄국정책을 유지해 원병 자체는 거절했다. [include(틀:문서 가져옴, title=에도 시대, version=380)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